프놈펜 노랑머리
캄보디아 사람들이 손재주가 좋다는 것은 많은 사람이 인정하는 편이다.
우리나라나 선진국에서 사고 차나 폐차 직전의 차가 캄보디아에서는 수리해서 잘 굴러다니고 수입 관세가 붙어 가격도 비싸다.
한국에서 일이백만 원이면 거래되거나 폐차할 2002년식 산타페가 여기선 만 불 전후한다.
캄보디아 정비 기술자가 계속 잘 고쳐, 얼추 십 년 이상은 굴러다닐 것이다.
이발 기술도 좋다.
남미나 다른 나라에서 이발할 때 삐뚤빼뚤 깎아서 항상 마음에 들지 않았는데 프놈펜에서는 대체로 예쁘게 잘 깎는다.
이발할 때마다 여기 젊은 이발사 여러 명을 한국에 데려다가 월급 천 불 정도 주고 이발소를 차릴 수만 있으면 재미 볼 거라는 생각이 든다.
요즘 일요일도 쉬지 않고 불량을 고치거나 재단을 하는 등 공장에서 계속 일하니 이발을 제때 하지 못해 흰머리가 보기 싫게 자랐다.
출근해서 집 근처 이발소에 갔다 왔다 하기 뭐하니 공장 옆에 있는 이발소에 갔다.
검은색으로 염색할 거냐고 물어서 잠시 뜸 들이다가 노란색으로 해달라 했다.
흰머리와 검은 머리가 섞여서 차라리 노란색으로 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남미 살 때 노란색으로 염색한 적이 있었고 타이 푸껫 살 때 빨간 머리를 하고 다닌 적이 있었다.
한국 같으면 연예인도 아닌 다 삭은 놈이 뭔 푼수냐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앞으로 살날이 꼭짓점을 넘어 내리막인데 외국에서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한,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살면 어쩌리.
노란색으로 염색하고 공장에 가니 우리 직원들 여럿이 얼마에 염색했느냐고 물어보고 멋있다고 칭찬한다.
아직 골고루 착상되지 않아 검은색과 흰색이 많이 보이지만 다음 염색할 땐 더 나아질 거로 생각한다.
글쓴이가 통신병으로 군대 생활할 때 비공식 깎사를 제대할 때까지 한 적이 있다.
자대에 들어가 매주 토요일 내무사열을 받는데 머리가 길거나 개인 청결 상태가 좋지 않으면 지적사항이 되어 중대원 전원이 호되게 얼차려를 받을 수 있었다.
금요일 밤까지 무슨 일이 있어도 머리를 단정하게 깎아야 하는데 대대에 하나 있는 이발소에서 졸병이 일과시간에 머리를 깎는다는 것은 상상할 수가 없고 자체해결을 해야 하니 일과 후에 서로 깎아주게 되었다.
자주 깎다 보니 이발이 되었다.
그래서 쉬는 시간마다 동료들 이발을 해주니 실력이 늘어 일주일에 많을 때는 백 명도 넘게 깎게 됐다.
그러니 33개월 군 생활하면서 내가 이발해준 게 얼추 만 명은 훨씬 넘을 것이다.
중고참이 된 후로는 중대원들 외출 외박 휴가 머리는 으레 글쓴이가 도맡아 예쁘게 깎아주었다.
그러다 제대하고 십 년 넘게 선박 생활을 하면서도 선원들 머리를 종종 깎아주었다.
배 탈 때는 이발할 데가 없어 장발로 다니거나 항구에 도착해서 머리를 깎아야 하는데 짧은 정박 중에 이발하는 시간 내는 게 만만치 않은 일이다.
아무튼 뭔가 대가 없이 주위 사람을 도와주는 일은 누가 뭐라든 행복한 일이다.
배 타면서 한국 월급쟁이 중 1% 안에 드는 급료를 받으면서 결혼하고 자식이 생기니 가족과 같이 살고 싶어 해상 생활에 매력이 없어졌다.
죽으면 썩어질 몸, 젊은 사람이 육상에서 뭘 하든 처자식 못 먹여 살리겠냐는 마음으로 배에서 내렸다.
지금 이발 이야기하다 말이 샜다.
마도로스를 그만두고 지방에서 작지 않은 식당을 했다.
고임금에 익숙한 일을 접고 선원 출신이 당장 할 수 있는 일은 한계가 있었다.
눈 뜨면 거친 파도가 치는 망망대해가 아닌 가족의 숨결을 느끼며 이게 바로 사는 행복이 아닌가 여기면서 자영업으로 자리가 잡혀갈 무렵 이발비도 줄일 겸 다섯 살 난 아들 머리를 직접 깎아주고 싶었다.
그동안 십수 년 넘게 수없이 남의 머리를 공짜로 깎아주면서 별일 없었는데 정작 내 새끼 이발하면서 욕실 창문으로 들어오는 바람에 몸에 두른 이발보가 날리면서 길들지 않은 새 가위로 아들 귀를 조금 잘랐다.
급히 지혈하면서 병원에 데려갔는데 어린 아들은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리며 의사에게 '선생님, 살려주세요.'라고 말하는데 가슴이 메어 말을 할 수가 없었다.
큰 상처가 아니니까 두 바늘인가 꿰매고 한동안 아들 귀 상처만 보면 눈시울이 뜨거워져 울먹이곤 했다.
그 트라우마로 아들 머리는 다시 깎지 않았다.
아무튼 뭐든지 할 수 있을 때 미루지 말고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더 나이가 들면 이런저런 이유로 잘 할 수 있는 것도 못 할 수가 있다.
그러니 뭐라도 움직여 주위 사람을 즐겁게 하고 또한 아직 살아서 뭔가를 할 수 있다는 게 정말 감사한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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