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만 톤급 벌크 캐리어
떠나는 배와 항구를 향한 마도로스 순정
"엘라~ 파파리~오!"
선박 VHF 무선전화에서 '치익~' 하는 잡음과 함께 그리스 선원이 파파리오라는 친구를 부르는 소리이다.
망망대해를 항해할 때 정말 며칠간 하늘과 바다 그리고 갈매기 말고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때가 자주 있다.
일본이 가까워져 오니 배도 많이 보이고 특히 그리스 혼승, 필리핀 선원이 탄 배는 아주 많다.
우리는 심심하면 '한국 배 있습니까?'라고 묻는다.
가끔 필리핀이나 다른 외국 선원이 장난삼아 어눌한 한국말로 '항국 배 이써요?'라고 호출하기도 한다.
응답이 없는 경우가 많고 멀리 보이는 배가 한국 사람이 탄 배 같으면 그렇게 호출한다.
다행히 한국 선원이 들으면 대부분 반갑게 응답한다.
그렇게 통화하다 보면 동문이나 전에 같이 배를 탔던 사람의 소식을 듣고 당직을 마친 후 식당에 내려가 설을 푼다.
송출선이 부산이나 한국 항구 가까이 지나가면 캡틴이 배를 육지 가까이 붙여서 항해한다.
해외 취업선은 승선 기간 중 한국에 들어가기가 쉽지 않고 이렇게 가까이 지나가면 VHF 무선전화로 가족들과 통화하게 배려한다.
위성 전화도 있지만, 요금이 비싸 아주 급한 일 아니면 자제한다.
간단히 통화하라고 말하는데 오랜만에 가족과 전화하면 그게 그렇게 되나.
몇 사람 통화하지 않고 전화는 감이 멀어진다.
그러면 어떤 캡틴은 배를 다시 돌려 전화를 할 수 있게 해주기도 한다.
그러다 보니 젊은 선원들은 앤 목소리라도 한 번 들어보려다가 애석하게 차례 기다리다가 종친다.
스마트폰이 나오기 전 모습이다.
해피 라틴호와 같이 자동차와 곡물, 광석 모두 실을 수 있는 배를 Car & Bulk carrier라고 한다.
선창 안에 차를 실을 때 쓸 카 데크를 천장에 싣고 다니는 겸용선이다.
광석, 벌크 그리고 기름을 실을 수 있는 OBO선은 광석을 풀어주고 운임 좋은 기름 운송 계약이 되면 선창 물청소를 한다.
반대로 원유를 하역하고 광석이나 곡물을 실으라 하면 갑판부 선원은 뺑이 쳐야 한다.
Crude oil washing systems라는 원유 세정 설비가 되어있지 않으면, 80˚ C로 데운 바닷물로 홀드를 다 청소해야 하니 고되고 험한 작업이다.
브라질에서 철광석 26만 톤을 싣고 중국으로 가다가 침몰한 스텔라 데이지호는 유조선을 벌크선으로 개조한 노후선이었다.
배는 인간의 이동과 무역에 큰 역할을 했다.
제국주의 국가의 식민지 건설과 노예무역을 하는 데에도, 다른 지역의 물류와 씨앗을 전 세계에 퍼트려 인류가 발전하는데 선박이 없었다면 시간이 더 걸렸을 것이다.
15세기 이후 유럽인들이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하고, 신대륙 이주를 위해 사람을 태우고 다닌 것도 다 배였다.
신대륙을 개척해서 빼앗은 금은보화와 자원, 식량을 유럽으로 운반한 것도 선박이었으며, 농작물이 넉넉해지자 인구 증가로 이어졌다.
벌크선은 곡물, 석탄, 광석 등 포장되지 않은 벌크 화물을 실어 나르는 상선이다.
19세기에 처음으로 영국에서 벌크선이 나온 후 용량, 안전, 효율과 내구성이 계속 발전했다.
항공기가 날아서 사람과 물자를 빠르게 실어나르는 현대에도 선박 수송은 효율 면에서 항공 수단과는 비교할 수 없다.
전 세계에 떠다니는 배 중 유조선과 가스선이 약 30%, 컨테이너선이 15% 그리고 나머지 반 가까이가 벌크선이다.
전체 벌크선의 반 이상이 그리스, 일본 그리고 중국 소유이고, 그중 25% 이상은 파나마 선적으로 등록되어 있다.
배를 만드는 건 대한민국이 가장 대표적인 나라이고, 전체 신조선 중 약 80%가 한국, 일본, 중국과 대만에서 건조한다.
큰 배를 잘 만드는 것이 돈도 되고 국력의 상징이라 할 수 있다.
미국, 영국, 프랑스 등 인건비가 비싸 조선소가 잘 안 돌아가는 선진국에서 첨단 기술을 개발하여 받는 로열티는 어마어마하다.
중국은 배를 많이 만들지만, 아직 기술력이 떨어져 이 년도 안 된 LNG선이 항해 중 퍼져서 예인선으로 끌고 가 수리해도 못 고쳐 폐선한 적이 있다.
선박 결함으로 지불하는 해상 보험료의 반 이상이 중국에서 만든 배라고 한다.
비행기가 나온 후 장거리 여객 수송의 역할은 넘겨주었지만, 섬을 이어주는 여객선과 관광 크루즈 같은 것은 아직 많이 다닌다.
화물 운송에서는 여전히 비교되지 않는다.
화물선이 나라 간의 물류를 대규모로 실어나르니 나라마다 항공기와 함께 해당 관청에서 등록해 관리한다.
그래서 모든 배는 사람의 주민등록처럼 영국 로이드 선급에서 발급하는 국제해사기구의 선박 고유 번호를 가지고 있다.
라틴어에서 선박을 뜻하는 Navis가 여성명사라서 서구권에서는 선박을 여성으로 표현한다.
영어의 대명사도 She를 썼다.
배를 다 만들고 진수식을 한 후 처음 항해하는 걸 '처녀항해'라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여성형 표현이 없지만, 비슷한 타입의 배를 '자매선'이라고 말한다.
우주선은 Spaceship 즉, 우주 배라고 부른다.
배의 운항은 바다와 항구에서 선원들이 맡는다.
보통, 화물을 싣고 근해에서는 며칠, 원양 항해는 보름 전후로 항해한다.
19세기에 벌써 컨베이어로 화물을 싣고 풀어 하역 시간을 줄였다.
벌크선은 단일 선창이 여러 개로 삼만t급 배는 네댓 개, 십만t급 전후는 6~ 9개로 다양하다.
빈 배로 항해 중에 휴일에 날씨가 좋아 바다가 잔잔하면, 선창에 내려가 축구나 족구를 하고 한편에서는 응원하며 고기를 구워 맥주를 마시기도 한다.
글쓴이는 술 마시며 농담 따먹기 하는 걸 좋아하는 안주파이다.
배 안에서 공 찰 때는 조심해야 한다.
바닥이 철판이고 배가 계속 흔들리니 발목이 삐거나 부딪히지 않아야 한다.
짐을 다 싣거나 깨끗이 청소해 놓으면, 해치 커버를 닫고 그 위에 방수포를 덮어 바닷물이 들어오지 않게 한다.
육상 크레인이 없는 항구에서 화물을 하역하기 위해 본선에 크레인이나 데릭이 있다.
일반인이 궁금해하는 벌크 운임은 일정하지 않으나 권위 있는 영국의 Clarksons Research에서 매주 발표하는 것을 참고해보자.
미국 걸프 해안에서 중국 간 곡물 해상 운임은 톤당 약 40불 내외이고 미 서부에서 일본까지는 20불 선이다.
뉴올리언스항에서 곡물 이십만 톤을 실어 중국에 풀어주면, 약 이십오 일 항해에 80억 원 이상이 들어온다는 말이다.
하역하는 시간과 짐 실러 빈 배로 가는 것을 고려해서 두 달 걸려 80억 벌어 기름값과 보험료 주고 감가상각비 등을 빼면 괜찮은 장사일 것이다.
마도로스 월급이 많으니 적니 해도 한 배에 이십여 명 타서 벌어주는 돈에 비하면 선원 급료는 정말 껌값에 불과하다.
어떤 선주나 화주는 톤 당 정해진 가격 대신 용선료를 내고 배를 통째로 빌려 쓰기도 한다.
요런 걸 배워서 잘하면 큰돈 안 들이고 떼돈 벌 수도 있다.
전에 아파트와 피아노로 유명했던 삼익상선에서 사선 십여 척에 용선을 백여 척해서 엄청나게 벌어 '백억 불 수출상'을 받아 해기지에 사진이 대문짝만하게 나온 적도 있다.
파나마운하를 통과할 수 있는 크기로 만든 십만 톤 이하의 배를 파나맥스선이라고 한다.
운하를 통과할 수 없는 큰 배는 남미 남단 마젤란해협이나 아프리카 희망봉을 돌아서 가야 한다.
십만 톤이 넘는 대형 벌크선은 크레인 없이 컨베이어로 쏟아붓는 큰 항구만 전용선으로 다닌다.
큰 유조선과 마찬가지로 대형 벌크선의 비애는 비슷하다.
포철이 호주 철광석 회사와 장기 운송 계약을 한 배를 타면, 승선하는 동안 허허벌판인 호주 광산 부두만 주야장천 다닌다.
그러니 마도로스의 낭만인 여러 나라에 기항할 일도 없고, 항구의 이국 아가씨와 맥주 마실 기회도 별로 없다.
그저 세월 죽이고 돈만 버는 기계라고 할까...
큰 배 타서 덕 보는 것은 웬만한 파도에는 꿈쩍하지 않고 항해하는 것과 월급 조금 더 받는 것뿐일 것이다.
군함이나 화물선이 수명을 다해 퇴역할 경우 고철로 폐선한다.
주로 인도와 파키스탄, 방글라데시에서 해체작업을 한다.
일부 큰 업적을 남긴 군함은 수리하여 항구에 두고 전쟁 역사박물관으로 이용한다.
범선이나 크루즈 여객선이 퇴역하면 인테리어를 멋지게 해 선박 레스토랑이나 카지노로 사용하기도 한다.
배는 바다를 향해 항구를 떠나지만, 마도로스의 마음은 늘 휘황찬란한 항구에 머물러있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예쁜 배는 퇴역해도 항구에 남아 멋진 자태를 뽐내는데 본 영감이 은퇴하거나 돌아가시면 과연 뭐가 남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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