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도를 기다리며
나의 황홀한 실종기
산울림 소극장에는 연극 '나의 황홀한 실종기'가 공연된다.
알츠하이머에 걸린 80세 여성이 주인공.
'치매 환자도 마지막까지 삶의 주인공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싶다'는 게 대본 첫 장에 적힌 작가의 말이다.
작가 윤금숙?
연극계에는 알려지지 않은 작가.
그녀를 아는 사람은 없었다.
그럴 수밖에 윤금숙은 세상에 없는 사람이니까.
진짜 작가는 불문학자 오증자 씨다.
연출가 임영웅 씨의 아내지만, 번역가, 불문학자로 이름이 높다.
'실종기'는 그녀가 78세에 처음으로 쓴 창작 희곡이다.
뒤늦게 얻은 자식 같은 작품을 그녀는 한사코 감추려 했다.
가짜 작가 윤금숙은 '실종기'의 주인공 이름.
인터뷰도 절대로 안 하겠다고 했다.
간곡한 부탁 끝에 산울림 소극장 인근 카페에서 마주한 오 씨는 '제가 엉터리라서 그래요.'라고 입을 뗐다.
"저 자신을 다스리는 것도 쩔쩔매는 사람인데…. 언론에 나가면 스스로 대단한 사람인 줄 착각하게 되고, 허튼 위상에 취하게 되면 타락되기 때문이에요. 인간으로서 학자로서 자기 정진이 없어져요. 빨리 퇴보하고 빨리 퇴화하게 되고요. 예술가나 지성인이라는 사회적 시선에 취하면 망가지기 쉬운게 사람이죠. 자칫 작품보다 제게 더 시선이 쏠릴까봐 걱정이 되기도 했어요."
경기여고와 서울대 불문학과를 졸업한 오 씨는 이화여고에서 11년간 교편을 잡았다.
출판사 샘터의 주간으로 4년 일하다 1982년 서울여대 불문학과 교수로 옮겼다.
남편 임 씨가 1970년 극단 산울림을 창단하고 1985년 현 위치의 자택을 헐어 산울림 소극장 문을 열게 된 것도 오 씨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한국 연극의 자존심이 된 '고도를 기다리며'나 1986년 초연 당시 커다란 화제였던 시몬 드 보부아르의 '위기의 여자'도 오 씨의 번역으로 무대에 올랐다.
부부는 여성신문이 선정하는 평등부부상을 받았다.
"생각으로는 평등하죠. 그걸 유지하느라 제가 고생을 많이 했어요."
오 씨에게는 늘 간절함이 있었다.
일반인은 외면하고 싶은 치매 환자를 소재로 택한 것은 한 실버타운에서 운동 요법 치료를 받게 되면서부터였다.
"고독하게 보이지 않으려고 별의별 걸 다 하더라고요. 띠별 모임, 교회 모임 등등. 한 발 떨어져 지켜보니 마음이 서늘하고 아팠어요. 존재의 의미를 어떻게든 붙잡고 안 놓으려는 사람들은 제 모습이기도 하고 우리 모두의 미래이기도 하고. 그래서 누구에게든 현실이 될 수 있는 보통 노인의 치매를 얘기해보자 싶었어요."
의욕에 불을 붙인 이는 배우 손숙 씨.
산울림 극단 창단 단원인 손 씨가 올해로 연극 데뷔 50주년을 맞게 된 사실을 알았을 때, '저 배우의 50주년 기념작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배우도 빛나고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기도 빛나고요."
오 씨는 한 달간 집 근처 커피 전문점을 작업실 삼아 출퇴근하며 생애 첫 희곡을 썼다.
거울이 달린 벽을 마주 본 자리가 그녀의 고정석.
작품도 치매 환자가 거울을 보고 대화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후다닥 써놓고 보니, 과연 제대로 소통이 될까 노심초사했어요. 읽어본 손숙 씨가 굉장히 좋다고 해서 그제야 마음이 놓였지요. 무대에서는 어떨까 상상하면 긴장되고 기대되요. 뭔가 도전장을 낸 거 같아요."
'나의 황홀한 실종기'는 3월부터 연습에 들어갈 예정.
임영웅씨가 연출을 맡는다.
임 씨는 최근 건강이 그다지 좋지 않음에도 '반드시 하겠다.'고 열정을 불태우고 있다.
팔순을 바라보는 부부의 첫 공동 창작품이다.
The first time ever I saw your face, Roberta Fla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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